사람들이랑 얘기하다보면, 건축관련 글을 읽다보면, 그냥 떠다니는 신문이나 블로그들을 보다보면 재미있는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모두들 자기만의 이상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흔히 현대 사회에서의 유토피아란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메트로폴리스의 삶에서 발견되는 것은 유토피아이기보다는 유토피아가 거부당한 디스토피아이거나, 유토피아가적 이상향이 탈산업화의 영향에 의해 헤테로토피아로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20세기 막시즘의 실험들은 실패로 끝났고 남아있는 공산주의 몇 국가는 거의 초기의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먼 재앙과 비슷한 것이 되어 버렸다. 한편으로는 21세기에 유토피아를 운운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발상이기도 한 것이다.
그치만, 유토피아가 무엇이고 어떻게 정의되는지를 곰곰히 생각하다보면, 그것은 단순히 시대구체적이지도 않고 항상 집단적이지는 않으며, 항상 의식적으로 실천되어지지도 않는다. 좀 더 관대하게 바라본다면, 유토피아는 시대를 초월해서 존재해 왔고, 집단이나 단체를 통해 현실화되지 않을 때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의 나이브한 소망이나 바램 등을 통해서 파편적으로 있어 왔으며, 본인은 유토피아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어떤 형태로든지간에 유토피아적 이상향을 무의식적으로 품고 지내게 되는 것이다.
모던 타임스에서 보면 찰리 채플린과 그의 연인은 유토피아를 꿈꾼다. 1930년대 미국의 급변하는 산업화의 시대로부터 탈피하고싶은 마음에서, 말그대로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같은 집으로 가서 살고자 한다. 비록 현실은 냉혹할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현재 느끼는 이상향이 채플린이 생각한 것과 크게 다를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종교를 믿고, 사후에 자신이 초월자에 의해 편안한 곳에서 잘 살 것이라는 이상향을 꿈꾼다. 현실은 냉혹하고 비정하지만, 사후는 그렇지 않을 거라는 일말의 희망일 것이다. 그래서, 입증여부를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스스로를 의지하는 자신을 재차 확인하며, 매주 혹은 매일 어떤 종교단체에 참석하며 스스로에게 안심을 시킨다.
꼭 종교에 국한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조별모임에서 토론을 하다가, 누군가는 토론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기가 마음 속으로 그리던 활발하고 생산적인 토론과는 대조적으로, 너무 소모적이고 비참여적인 토론분위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토론이 마음에 들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차이가 크다고 생각하는 그 누군가는, 이미 마음속에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티비앞에 앉아서 정치를 늘상 이야기하는 아저씨들의 말을 귀기울이고 있노라면, 현재는 항상 무언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 과거에는 안그랬는데 현재에는 뭔가가 잘못되도 한참 잘못되었다. 나는 옆에서 관조하면서, 그 완벽한 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를 스스로 반문해본다.
여하튼 현재는 늘 부정되면서 인정되기도 한다. 한 사람의 마음 속에는 현실을 인정하기 싫으면서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무력한 자신을 보게 된다. 몸은 현실 세계에 있지만, 마음은 반드시 현실 세계에만 갖혀 있지는 않는다. 마음은 과거로 향할 수도 있고, 미래로 향할 수도 있고, 혹은 초시공간에 있을 수도 있다. 지금보다 일말의 진보나 개선을 마음속에 품으면서, 그로 인해 생기는 막연한 희망은 소화기관으로 들어가는 빵이나 밥보다도 더 귀중한 식량이다. 결과에 상관없이 희망으로 인해 생기는 에너지는 자체로 값진 것이다.
나도 내 마음속에 항상 유토피아가 있음을 느낀다. 공상이 많은 나는 자연히 유토피아적 상상도 많이 하게 된다. 현실이 마음에 안들고, 조금 더 나은 현실을 꿈꾼다. 왜 사람들은 저정도밖에 못할까.. 왜 좀 더 상냥하고 왜 좀 더 현명하고 왜 좀더 재치있게 행동하지 못할까.. 왜 지금도 항상 테러가 있고 가난이 있을까. 과거에 설령 생존의 위협이 있었다 치더라도 현재에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현재 동시간대의 세계 다른 장소들에서 일어나는 위협들을 내가 직접 겪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애써 그 무서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 나는 그러한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겠지라는 다소 비굴한 자기확인을 머릿속에서 그려보기도 한다. 오늘밤을 자고나면 내일은 조금은 다른 내가 되어있겠지라는 근거없는 희망을 가져 보기도 한다. 혹은, 내일도 오늘이랑 똑같을 것이라는 예측이 유효할 것이라는 희망을 마음 속에 품은 채, 그 다음날 맞아떨어지는 예측과정에 스스로를 달랜다.
유토피아는 항상 현재진행형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말한 유토피아는 바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항상 존재해 오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유토피아가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은 인간의 특권일 것이다. 두뇌가 마비되기 직전까지 사람은 아마 유토피아를 꿈꾸며 살아갈 것이다. 유토피아는 순도 100%의 완벽한 세계이지만, 항상 100%가 될 수 없는 현실에 사는 나는 전혀 100%의 상태를 꿈꾸지 않는다. 그럼에도 꿈꾼다는 자체가 이미 100% 상태를 1%라도 마음속에 품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살아간다는 것, 유토피아를 마음 속으로 품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모순적이다. 다시 말하자면,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기대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지간에 기대를 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오고 있다.
글쎄.. 그렇다면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유토피아는 버릴 수도 더 가까이 가질 수도 없는 무형의 대상이자 현실 그 자체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유토피아를 항상 품고 사는 한 사람으로서, 유토피아에 대한 성찰은 살아간다는 자체가 얼마나 역설적인지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하나의 렌즈라고 생각한다.